우리가 사랑한 시, 백석, 김소월, 시 낭독


에서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정리한 법률서적에는 “산천에서 유희를 즐기는 여자는 100대손이 될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조선시대 담장 너머의 세계는 당시 여성들에게 커다란 차별이자 도전이었다.

당시 100장 받은 죄인은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야 할 정도로 엄격했기 때문에 당시 여성의 보수적, 사회적 시각을 엿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도 남성과 거의 동등한 지위와 권리를 갖고 제사에 참여할 자격이 있었던 여성도 선남자 연하사상을 강조한 조선의 유교사상으로 일정한 위업을 이뤘다.

그리고 세 종류의 리더십, 저는 일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풍류와 문학을 즐기던 조선 최초의 여성 시조 삼호정시사가 큰 인기와 호평을 받은 것은 당시로서는 이상했다.

당시 이 모임을 주재한 김금원은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동물이 아니라 사람이 된 게 다행이다.

오랑캐의 땅이 아니라 문명의 땅 조선에서 태어난 것이 다행이다.

그런데 남자가 되지 않고 여자만 되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 그럼에도 김금원은 14세 때 호서, 금강산, 금강산, 금강산 등을 부르며 기행기를 남긴 도전자였다.

김금원과의 문학적 교류는 당시 양반 사대부 사이에 형성된 일종의 팬덤과 그녀의 문학적 업적을 높이 평가할 정도로 강렬했다.

삼호정시사는 한강을 배경으로 한강을 배경으로 계급사회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깊은 슬픔과 원망을 승화시킨 작품으로 뛰어난 시적 재능을 지닌 여동생 김금원과 운초, 경산, 죽서가 하나의 정자로 엮여있다.

오늘의 용산 삼호정. . 이후 죽서의 죽음과 김금원의 이적 등으로 활동을 접었지만 삼호정시사의 많은 작품은 한국 여성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당시 삼호정시사의 분위기는 김금원이 남긴 회고록을 통해 생생하게 재현된다.

“그들은 함께 놀고 테이블은 비단 두루마리로 덮여 있습니다.

온갖 시세와 가구가 진열대를 가득 채운다.

시를 낭송할 때 울려 퍼지는 소리는 쇠를 치는 소리, 옥을 깨는 소리와 같다.

” 조선 여류 시인들의 뛰어난 솜씨가 눈길을 끌 듯 날아간다.

특정 시인의 노래시는 고대부터 주목을 끌었습니다.

아마도 다른 문학보다 음악에 가까운 리듬과 질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라디오보다는 휴대폰이나 텔레비전을 통한 시각문화가 유행한 지 오래지만, 시 읽기는 지친 눈을 쉬게 하고 듣기를 통해 휴식을 취하고자 하는 현대인의 욕망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해방 이후의 시 읽기 문화는 어떠했는가? 1952년 12월 이화여자대학교 임시건물에서 해방 후 첫 대규모 시낭독회가 열렸고, 이들은 부산으로 피신했다.

당시 2,000여 명이 참석했고 당대 최고의 시인 33명이 참가한 시의 밤은 지루한 형식과 격식에서 벗어나 시인들의 실험적 시도로 열의를 불러일으켰다.


김수영 시인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무대 위를 걸으며 책을 읽었고, 박인환 시인은 좋아하는 담배를 피우며 시를 낭송했으며, 김규동 시인은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열람실 분위기를 연출하며 낭독을 마쳤고, 이후 ‘시인 만세’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시 낭독회가 큰 호응을 얻으며 큰 호응을 얻었다.

1967년 서울에서 열린 제1회 시낭독회에는 약 3,000명, 1986년에는 19년 동안 개최된 제2회 시만세에 1,200여 명이 찾아왔고, 1987년 11월 1일에는 제3회 시인만세가 열렸다.

4,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행사장을 가득 메웠고 이날은 특별히 ‘시의 날’로 지정되었습니다.

시인만세는 우리나라 시인용 문화를 전문적으로 창시하고 발전시킨 명예시인 김성우의 대규모 낭독회였다.

1967년 고등학생 시절 부산에서 열린 시 낭독회에 참석했던 김성우는 훗날 이렇게 썼다.

시 낭송의 기본과 노하우를 정리한다.

1980년대 수십만 권의 시집이 팔린 것을 정점으로 2014년부터 시집 판매량이 꾸준히 늘고 있다.

이는 시를 좋아하는 이들의 관심이 꾸준히 이어지고, 젊은 시인들이 인기를 얻으며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SNS에 공유하고 소비하는 현세대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 강하다.

또한 짧은 시의 지속음은 바쁜 출퇴근 시간에도 또 다른 매력으로 작용한다.

실제로 해외에서 동시대 시인들의 시집을 ‘포엣 라인’으로 묶어 판매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만큼 우리 시문화가 강하고 변주도 꽤 탄탄하다는 뜻이 아닐까요? 최근에는 독자가 시인의 목소리로 시를 읽을 수 있는 시 낭송 플랫폼이 개발되어 주목을 받았다.

시뿐만 아니라 시인의 아우라까지 담은 ‘페르소나’ 플랫폼이다.

플랫폼 페르소나는 한국을 대표하는 현역 시인 50인의 리사이틀 앨범도 발매했다.

소월과 백석이 남긴 근대시의 세계 소월과 백석의 시가 우리 현대시의 원형이라는 말이 많다.

평안북도 오산고를 졸업하고 사상과 활동이 비슷한 두 시인은 궤적이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그들의 삶은 확연히 다르다.

〈진달래꽃〉, 〈엄마와 누나〉, 〈산유화〉 등 적나라한 묘사를 많이 남긴 소월의 작품은 시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두 궤적은 외울 정도로 친숙하다.

배우다.

하지만 그가 직접 편찬하여 펴낸 유일한 시집(1925)은 소월의 기대와 달리 출간 당시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출시 후 소월은 경제적 빈곤과 주류 문단으로부터의 소외, 일본 경찰의 감시에서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다가 1934년 3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과 결별한다.

평론가 김우창은 소월을 “단순하고 서정적인 시로 가장 아름답게 낭만적인 슬픔을 노래한 시인”이라고 정의했다.

소월의 비단결 같은 시를 흥얼거리면 노래와 시가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

박연준 시인은 소월의 슬픔을 “이불을 걷어내야 드러나는 미지의 감정, 감춰진 슬픔”이라고 표현했다.

한편, 현대소년이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노춘명 시인의 시 ‘사슴’의 주인공 백석은 당대 가장 아름다운 작가로 유명했다.

내성적인 성격의 소월과 파격적인 기질이 강한 백석의 행보는 전혀 달랐다.

특히 백석과 기생 김영한의 러브스토리는 장안을 들썩이게 할 만큼 뜨거웠다.

김영한은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지만 평생 백석을 사랑하고 존경했다고 한다.

이후 김영한은 서울의 3대 선녀 중 하나인 대원각의 주인이 되어 자신의 유언으로 대원각을 불교단체에 기증했다.

이곳은 지금의 성북동 길상사입니다.

재산을 기부한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1000억원은 백석의 시 한 줄도 안 된다”고 주장한 일화가 유명하다.

시집을 내고 바람처럼 사라졌지만 감동적인 노래를 남긴 소월과 한 여인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마음에 사랑을 새긴 백석. 왠지 오늘은 두 분의 시가 너무 그리워요.